겨울철 씨뿌리기가 끝나고 축제 준비가  한창일 몌프티나가 나를 찾아왔다. 얇은 검정 드레스 한벌만 입고 지역 전통주를 들고있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매혹적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물었다.


 "불편한 점은 없소?"

 "네…. 폐하 덕분에 모든 것이 좋습니다."


  그녀는 만들어진 듯한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여전히 근심과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가 숨기기 원하는 듯하여 모른척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만하시오."

 "아닙니다. 모든게 정말로 편하고… 데이지 하사도 친절하게 대해줍니다. 그녀가 세세한 점까지 신경 써주는 덕분에 불편한 점 하나 없습니다."


  데이지 그라프바인 하사는 카디안 44연대 출신의 부사관으로서, 부대의 몇 안되는 여성 간부였다. 나는 밝고 쾌활하다는 평을 듣는 그녀가 예프티나의 호위역 겸 말동무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17년 경력의 베테랑 군인에게는 모욕적일 수도 있는 부탁이었지만, 데이지 하사는 고맙게도 기꺼이 맡아주었다.


 "다만 그녀는 폐하에 대해선 잘 모르는 듯하여…"

 "나에 대해서? 그럴만도 하지. 데이지 하사는 본래 내 직속이 아니니까…….

 나야 특별한것 하나 없는 그저 늙은 군인일 뿐이지만, 궁금한 점이 있다면 알려주리다."

 "아닙니다……."

 "자, 뭐든 괜찮으니 사양하지 마시오. 뭐든 정직하게 대답하겠다고 맹세하지. 내 명예를 걸고."


  나는 나 자신에게 명예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그저 은하 변방에서 썩어가는 늙은이니까. 하지만 봉건 사회에서 이러한 맹세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녀는 치맛주름을 잡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내가 연이어 부추기자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에 대해? 나의 손님이고, 빌렘 1세의 딸이며 루리스탄의 어린 영주이지."

 "영주는 아니지만……."


  그녀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데바의 지역법은 여성의 작위 상속을 인정하지 않는다. 당분 간은 궁재(宮宰)가 임시로 영지를 관리를 하고 있지만, 그녀가 가문을 잇기 위해서는 모계 결혼을 통해 남자 아이를 낳아야 했다. 나로서는 가문이니 영지니 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전통이라는 것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안타까워도 나로서는 어떻게 해줄 수 없다.


 "그게 아니라…"


  그녀는 쭈빗쭈빗, 웅얼거리며 망설이다가 고개숙였다.


 "제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으음? 그대는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하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텐데."

 "그렇다면, 그렇다면 왜 제 방에는 오시지 않으십니까? 저는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나는 한참만에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소르라치게 놀랐다.


 "당신은… 당신은 나의 손님이오. 노예가 아니란 말이오."

 "폐하는 제가 봉사하기에 마땅한 분입니다."


  그녀가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길이 그녀 자신의 어깨를 스치자 비단 드레스가 물에 씻겨 내려가듯 사라졌다. 목덜미부터 아래로 흐르듯 내려가는 유려한 곡선과 긴 머릿결 사이로 언듯 보이는, 성야(聖夜)의 어두운 거리에 쌓이는 하얀 눈결과 같은 피부는, 아름다움을 넘어서 일종의 예술적 고귀함까지 느끼게 하였다. 나는 그녀의 눈 아래를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며 뒷걸음쳤다.


 "이러지마시오. 나는, 나는 그저 퇴물 군인일 뿐이오."

 "폐하의 성유물이 당신의 고귀함을 증명합니다. 황금 월계수가 황제 폐화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장교모의 황금 월계관도, 총독이라는 임시직도, 중대장 직위나 제국의 로드로서의 권위도 모두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 잠깐 빌려온 것이고 모두 잠깐 맡겨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걷어내고 나면 나라는 사람은 그저 늙은 군인,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퇴물 노병일 뿐이었다. 나는 내 어깨를 감싸는 그녀를 밀어내며 말했다.


 "진정하시오.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건… 제가 더럽기 때문인가요?"


  처음으로 그녀의 말투가 무너졌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다른 남성에게 욕보였기 때문에?"

 "아니야.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깨끗하다고 생각한다오."


  물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자 그녀를 품에 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뭔가 말하려 하더니, 결국에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한참을 울고 내 옷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나서야 까까스로 진정한 그녀는 내 망토를 둘러 나신을 가렸다.


 "무슨 문제가 있다면 이야기해주시오. 사정을 모른다면 협력 할 수가 없으니." "그게…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에서 남은 이는 저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더렵혀진… 몸이고 아버지는 역적으로 처형당했어요."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젖어있었다.


 "영지를 이을 사람이 없습니다. 가문을 이어야해요. 가능한 고귀한 사람의 자손으로…"

 "나는 딱히 고귀한 사람이 아니야. 나이도 많지."

 "폐하는 분쟁을 평화롭게 처리하셨고 기사도적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폐하의 자식이라면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겁니다."

 "나는… 그대의 할아버지 뻘이오. 더 젊고 좋은 사람이 있을텐데……."

 "역적의 더럽혀진 딸을 받아주는 이는 드물겁니다."


  그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이제 물러나보겠… 꺅?!"


  내 품에서 떠나려는 그녀를 나도 모르게 잡아당겼다. 나 조차도 놀란 일이었다.


 "폐하?"

 "나는… 그게…."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나를 그녀는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물에 씻은 구슬처럼 반짝였다.


 "말씀하세요."

 "나는 늙었고, 군인이오."


  그녀가 약간의 기대감을 담고 그렇게 말하자, 나도 모르게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언제 죽을지도 몰라.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도 없어. 그래도 좋다면."

 "제게는 아이만 있으면 됩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 자신을 가린 망토를 걷어냈다. 나는 옳지 않다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명분과 기회가 갖추어지자 얄팍한 인내심의 벽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니, 결혼합시다."

 "네…?"


  놀라는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우리는 그해 황제탄신일 축제 때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가능한 많은 시간을 예프티나와 함께하려 애썼다. 그녀는 아무래도 마음의 짐을 덜어낸 덕분인지 예전보단 밝아졌다. 내가 간혹 조급한 기색을 보이는 그녀에게 "조급해하지 마시오. 밤은 오늘만이 아니니까."라고 할 때마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종군한 수 많은 행성들, 특히 내 고향인 코어-3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지루할 법도 했지만, 고맙게도 그녀는 눈을 빛내며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때때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하고, 가끔씩 믿을 수 없다고 작은 투정을 부리면서도 그녀는 웃었다. 그녀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섬과 바다에 관한 이야기었다.


 "소금물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요."

 "데바에도 강과 호수가 있잖소."

 "그건 소금물이 아니니까요. 소금호수에서도 생명이 살 수 있나요?"

 "그런 곳에서만 살 수 있는 생물도 많지. 방패만큼 단단한 껍질로 몸을 두른 거북이나, 유난히 사람을 잘 따르는 범돌고래라던가, 빛나는 무지개처럼 갖은 색을 가진 산호…"

 "무지개는 뭐죠?"

 "일곱가지 색을 가진, 반원형으로 빛나는 다리 같은 것이지. 바다에서 비가 내리면 간혹 보이곤 한다오. 사람은 아무리 쫓아가도 닿을 수 없지만 무지개에 닿은 사람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더군."

 "저도 언젠가 볼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우리는 종종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나의 군역이 끝나는 날, 그녀를 코어-3에 데려다주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전투병과라면 누구나 그렇듯 신혼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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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크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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