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별이 지고 새벽 미명이 막 가시기 시작할 무렵, 다음 보초와 교대를 한 내가 막 그물침대에 누우려 할 때였다.
"적이다! 이슬람 함대다!"
나는 그물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주위에 잠들어있던 선원과 육군들도 모두 떨어지듯 그물침대에서 내려왔다. 포술장인 나는 재빨리 뱃머리로 달려갔다. 저어기 수평선에서, 이슬람 함대가 태양을 배경으로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해 수평선을 까맣게 메웠다. 아니, 이렇게 멍하게 있을때가 아니다. 주위를 보니 스페인 땅개들이 입을 벌리고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아! 배 처음보냐? 빨리 대포를 장전해!"
가만히 있는 신참 포병들에게 고참 포병들을 돕도록 지시했다. 포병들은 대포를 뒤로 당겨, 포신 내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는 약실에 화약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따라온 포병들도 작업을 거들었다.
내가 대포를 장전하고 있을때, 다른 선원들도 제 위치를 잡았다. 총사령선의 기신호에 따라 부관이 명령을 내리고 갑판장이 북을 두드렸다. 노잡이들이 북소리에 맞추어 노를 저었다. 우리 배는 미리 정해둔 대로 부사령관 로드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가 지휘하는 좌익함대 2열 우측에 자리잡았다. 위치 상으로는 좌익 기함의 바로 옆이었다.
"정지! 경계태세로 대기한다! 당번은 식사준비를 하도록!"
부관이 함장의 지시를 하달하자 식사 당번이 화덕에 불을 피우고 베테랑 선원들은 갑판 여기저기에 최대한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긴급상황에 대처하기 쉽도록 자리잡았다. 나도 포 옆에 기대어 앉았는데 신참 포병 하나가 눈치 없이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답답한 녀석.
그래도 다른 때 같으면 먼지가 나도록 팼겠지만, 전투 전이라 긴장을 했겠거니 하고 긴장을 풀어주고자 했다. 뭐, 아직 실수한 것도 없으니까.
"어이, 신참. 그… 이름이 뭐였더라? 어쨋건 여기 앉아."
"예, 옛! 전 카를로 입니다!"
아, 그래 카를로. 열두 살으로 우리 배에서 제일 어린녀석이었지. 노잡이의 피해가 적었던 덕분에, 다른 배와 달리 우리 배는 선상 경험이 없는 신병은 카를로 한명 뿐이고 함대 내에서 베네치아인의 수가 가장 많은 군용 겔리다.
"긴장되냐?"
"아, 아닙니다! 그냥 흥분되는 것 뿐입니다!"
호오? 이 자식 보게?
카를로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열두살 답지않은 씩씩한 태도가 이 소년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래? 다행이군. 그래도 힘빼. 괜히 벌써부터 힘주지 말고."
"벌써부터라뇨? 이제 싸우는거 아닌가요?"
카를로는 어리둥절한 듯 했다.
"아냐. 아까 부관이 식사 준비하라고 한거 너도 들었지? 식사하고 명령이 떨어질때까지 대기하는거야."
"명령은 언제 떨어지는데요?"
"그거야 총사령관 마음이지."
그 다음은 가족 이야기, 베네치아에서의 생활 이야기 등을 나누며 긴장을 풀어줄까 하는데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 혹시 패밀리 네임이 '젠'이냐?"
"네, 카를로 젠. 에헤헤."
"카를로 젠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네! 전 카를로 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고보니 카를로는 자기가 자원하는 걸 징병관이 곤란해하자 억지를 써서 입대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너 혹시 카를로 젠처럼 되고 싶다고 군에 지원한거냐?"
"네, 어짜피 전 넷째니까 혹시 전장에서 죽더라도 집안에 큰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고요."
이런, 곤란한 아이로군. 끔찍한 소리를 해대면서 씨익 웃고 있다.
보아하니 베네치아의 귀족 아니면 부귀한 상인 집안의 아이이리라. 포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수학을 배웠기 때문이겠지. 지금 베네치아는 스페인 땅개들 손을 빌릴정도로 인원이 부족하니까.
"너…."
"모두들 주목!"
내가 카를로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함장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보기 드물게 긴 칼을 찬 함장은 시뻘겋게 물들 얼굴로 주먹을 빙빙 휘두르며 짧은 연설을 늘어놓았다.
"이번 키프로스에서 벌어진 만행은 모두들 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한 번 맺은 협정을 일반적으로 파기하고 잔인한 고문을 자행한 비열하고 야만적인 이교도 투르크와 지중해의 상선을 약탈해 빌붙어 살아온 벌레같은 해적놈들을 오늘 모두 상어밥으로 만드는거다! 주의 가호가 너희들에게 있으리라!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 베드로의 가호가 너희들에게 있기를!"
함장의 말은 고요한 수면을 타고 투르크 함대에까지 들릴 기세였다. 적어도 좌익함대 전체에는 들렸으리라. 그러나 함장은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듯 했다. 그는 두 손을 펼쳐들고 만세를 외쳤다.
"야만인에게 죽음을!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 만세!"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 만세!"
고무된 선원들과 노잡이들, 심지어 죄수 노잡이까지도 함장을 따라 만세를 외쳤다. 이에 질세라 베네치아의 앙숙인 스페인 육군들도 만세를 외쳐댔다.
"스페인 왕과 그의 무적함대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스페인 왕국 만세!"
하나 둘 따라 만세를 외쳐감에 따라 함대 전체가 흥분으로 들끓었다. 각각의 만세는 어느 시점부터 박자를 맞추더니 모두들 한 목소리로 "이교도에게 죽음을! 기독교 연합 함대 만세!"를 외쳐댔다. 카를로도 신이 나서 만세를 외치며 뛰어다녔다. 거참, 힘빼지 말라니까….
나는 힘을 아낄 겸, 그리고 '교황청에 영광있으라! 토스카나 공국 만세! 교황 성하 만세!'나 '제노바 공화국 만세!', '성 요한 기사단이여!'같은 함성은 들려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이 늙은 몸에서는 카를로라는 아이를 꼭 살려내어 얼마나 훌륭하게 성장하는지 보고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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